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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해당하는 글(1)
2007/06/10   번역이야기 (11)


2007/06/10 00:02 2007/06/10 00:02
번역이야기

나는 그다지 multilingual이 아니라서 이런 이야기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나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두 가지뿐이다. 한국어와 영어. 다른 언어도 조금은 알고 있으나, 해당 언어로 된 문헌을 읽거나, 해당 언어로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제외하자.

나는 책을 읽을 때, 많지는 않지만 일정 비율은 영어 원서로 읽고 있다. 물론, 전공서의 경우 99% 영어이기 때문에 제쳐두자. 영어 원서를 읽는 목적은 어학능력 유지 혹은 향상 차원에서 읽는 것이 대부분이고, 간혹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어서 원서를 보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는 번역본에 대부분 만족하는 편이고, 원서로 읽더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번역본 이상의 이해도를 얻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가끔 '번역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수준이 낮아서) 원서로 읽어버린다'는 말을 들을 때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번역본 중에 정말로 질이 낮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한, 소설 같은 것을 읽을 때 '원문의 맛을 살리지 못한다'는 이유도 공감하기 힘들다. 내가 주로 소설을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어떤 언어로 읽어도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한국어 번역본과 영어 번역본으로 읽어보았다. 내겐 별다는 느낌의 차이가 없었다. 물론, 둘 다 번역본이라는 한계는 있겠지만, 어떤 언어든 작품이 주는 느낌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간혹, 언어유희 같은 것은 번역으로 나타내기 힘들겠지만, 그런 것이 주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면 전체적인 느낌이 크게 차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책을 통한 문화의 발전에 번역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번역이라는 작업을 폄하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수준낮은 번역은 지탄받고, 향상되어야 한다. 하지만 수준낮은 번역을 지탄하는 것으로 가장해서 번역 작업 자체를 깎아내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책은 원어로 읽는 것이 좋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고, 그만한 식견을 가지게 되기 까지는 상당한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좋은 책을 일정한 수준의 질을 유지하며 번역을 해준다면, 그 책을 읽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물론, 저자가 쓴 원문을 직접 읽어보겠다거나, 해당 언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면 원어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번역서를 폄하하는 것은 일종의 우월의식이 아닐까?

'번역서보다는 원서'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어공용론자'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영어공용론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영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까지 영어를 도입하자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한 가지 점에 주목하고 싶다. 영어가 공용어가 된다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일종의 '계급'이 형성될 것이다. '공용어'라는 것은 일종의 자격기준, 혹은 Standard이기 때문에, 이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과 이것을 갖춘 사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계급이 분화된다. 그런데 현재 국내 영어교육 현실상 상당한 수준으로, 특히 높은 수준으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득권층이다. English Native 수준으로 범위를 한정하면 더욱 그렇다. 이 정도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영어권 체류 경력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일정수준 이상의 재력이 있다. 현재에도 영어를 기준으로 사실상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갈리고 있는데, 영어공용화를 공식적으로 시행해 그것을 부추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원서를 보는 것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영어공용론자가 생각난다. 원서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원서로 읽는 것에 상당한 장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번역서를 읽는 것이 해당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그다지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국내에 번역된 텍스트가 '정말로 질이 떨어진다면', 그것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해주길 부탁드린다. 모든 사람이 원서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번역서가 많이 나오는 것이 우리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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