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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이 글귀를 마주했을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신문에 실리는 북 섹션 기사가 일종의 마케팅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 마케팅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꺼림칙 할 때가 있어서 주의하곤 한다. 때론 양서보다는 마케팅만이 요란한 책을 허무하게 구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그런 마케팅의 요소가 엿보였다. '제 23회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작'이라고 홍보하고 있었는데, 그 상을 수상한 해가 1982년이다. 이 책 역시 그 때 일본에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이 무슨 까닭으로 지금에 와서야 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을 소개하고 있었지만, 그런 책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나는 여행의 길 위에서 마주친 수많은 일본인 배낭여행자들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많은 일본인들이 배낭 하나를 메고 전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어로 적힌 일본 가이드북을 보며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토양에서 그런 여행자들이 나오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저자인 후지와라 신야는 1944년 후쿠오카 출신으로, 20대부터 10여 년 간 인도, 티벳, 중동 등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여행을 떠날 때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데, 이후로는 사진가로 활동해왔다고 한다. 그런 약력을 보고 있자니 문득 티벳에서 만난 '핫산'이라는 일본 아저씨가 떠올랐다. 특이하게도 이슬람교도였고, 죽은 그의 부인도 이슬람교도였는데,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라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가는 길에, 시가체부터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공동으로 렌트한 지프에 합승했었다. 티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일본에서 출판한다고 하던데, 어쩐지 일본의 저력은 오히려 이런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후지와라는 1980년대에 약 400일간 유럽이 시작되는 곳이자 아시아의 서쪽 끝인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시리아, 이란, 파키스탄, 인도, 버마, 태국, 중국, 한국을 거쳐 아시아의 동쪽 끝인 모국 일본으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아시아의 스펙트럼을 장기간의 여행으로 연속적으로 경험한 것이다.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아시아의 황량한 서쪽에서, 힌두문화의 인도를 거쳐 물과 식물이 풍부한 불교적인 아시아의 동쪽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느낀 것이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고민한다. 그렇다. 여행이라는 것은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진가의 책 답게 올컬러의 사진이 많이 실려있다. 책도 코팅지가 반양장으로 묶여있어, 물리적인 질에 있어서는 우수하다. 그 안에서 후지와라의 프레임 속에 잡힌 1980년대의 아시아를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런 책을 읽고 그 많은 일본 친구들이 세계를 향해 떠났던 것일까. 책의 마지막에는 '여행의 빙점'이란 짧은 글이 실려있다. 그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삶의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인상 깊은 구절:
<동양기행 1>
- 동양인들의 삶은 개인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삶은 길가에 버려져 있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려 있다. 개인적이어야 할 공간이 사람들 면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8년 전 캘커타를 방문했을 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느 가정집을 지나가다가 출산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그래서 동양을 사랑한다. 몇 년 전부터 나와 똑같은 혈액이 물결치는 동양의 자태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분명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부분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장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것. 선악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뒤섞여 있는 그 거리에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pp.49-52)
- 언젠가 한번은 수첩에 연필로 적어둔 장거리버스 시간표의 3이라는 글자가 양의 목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한 방울 선지피 때문에 더럽혀졌다고 중얼거리며, 그 위의 5라는 글자를 선택한 적이 있었다. 길흉의 조짐을 들먹이며 마음 졸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레 펼쳐지는 형편에 몸을 맡긴 채 예측하지 못한 우연을 통해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 하고 기대감을 품는, 여행 중에나 맛볼 수 있는 일종의 장난이다. (p.167)
- 이스파르타가 여기인가요? 그것은 순전히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애시당초 이스파르타로 가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 그러나 이 즉흥적인 거짓말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말이란 언제든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이다. / 나의 경우처럼 어제 했던 말이 오늘 돌아오는 날도 있다. 1주일 후, 한 달 후 돌아올 때도 있다. / 10년 전에 무심코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그 말이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10년 후의 나를 결정해주는 경우도 있다. (p.170)
-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태도를 결정해버리면 나중에 후회할 일만 생긴다. (p.254)
- 다가오는 거리……멀어져가는 거리 / 거리는 / 사람은 / 여행은 / 두 번 다시 되돌이킬 수 없다. (p.285)
<동양기행 2>
- "쌀이지요." / 라고 남자는 대답했다. 나흘째가 되던 날 오후 3시쯤, 야외 노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쟁 중 일본군에게 일본어를 약간 익혔다는 60세 전후로 보이는 중국계 버마인이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이 남자에게 버마 사람들은 보기에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뭘 먹고 사는가, 라고 물어보았다. / '쌀'이라는 대답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았다. 민가라돈 공항에서 본 그 엄청나게 드넓은 수전의 풍경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 "그런 이곳에선 농부들만이 열심히 일하고 있겠군요."라고 말하자 "농부들도 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하고 남자는 대답한다. "논두렁에 서서 이렇게 뒷짐만 지고 있지요." 남자는 몸짓까지 해보였다. / "논만 바라보는 겁니다. 비가 오든, 날이 개든 벼는 멋대로 잘 자라니까요." / "하지만 모내기도 해야 하고, 수확이나 탈곡은 사람이 해야 하잖아요?" / "그때가 되면 동인도의 아쌈이나, 나가랜드 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와요. 힘든 일은 그 사람들이 다 해줘요." / "그렇다면 버마의 농부들은 평생토록 뒷짐을 지고 논만 바라본다는 말이군요?" / "뭐 그런 셈이죠." (p.85)
- 예전에 표고 4,000미터의 티베트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두 번 다시 저 푸르디 푸르른 하늘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상에 내려온 뒤에도 그때의 확신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지역을 여행하든 하늘이 탁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p.174)
- 이 여행에서 내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나는 단지 '길을 걷는 자'였으며, 그 길에서 마주친 것들을 '보고하는 자'에 지나지 않았다. (p.261)
- 그리고 한국. / 이곳에서 다시금 미소가 부활한다. 그러나 버마, 태국 같은 불교적 점화미소는 아니다. 유교적인 박애의 미소다. / 그 미소는 때때로 격한 슬픔과 분노를 드러낸다. '너무나 인간적인' 한국인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르면 공업제품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이 이 나라의 국민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무엇보다도 이들에겐 자기제어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다정한 마음이다. / 판소리를 듣고 그렇게 확신했다. 한국을 여행하면서 썼듯이 판소리는 감미로움을 뛰어넘는 격정적인 인간의 슬픔과 뜨거운 분노였다. (pp.281-282)
- 인공환경에서의 인간은 인간사회에 봉사하는 일종의 종속물이다. 그것은 인공환경의 목적이기도 하다. 자연환경에서의 인간은 그 사회의 자의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사회 모두 자연환경에 종속되곤 한다. / 자연적 환경에서는 인간과 사회가 각각의 자아로서 대립한다. 즉, 서로에게 '상대'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상대성에 의해 인간과 사회가 제어되고, 생존의 모럴리티는 체계적인 양식을 갖추게 된다. 다시 말해 주어진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자의식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 같은 자의식이 종교가 된다. 종교적 양식이 상반되는 이슬람권에서도, 힌두권에서도 동일한 질서가 성립된다. / 그러나 인공적 환경에서는 이 같은 질서가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상대성이 결핍되어 있다. 종교, 즉 모럴리티를 탄생시킬 기반이 없고, 욕망을 제어할 장치가 없다. 나의 자아가 무엇인지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없다. (p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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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
2008/10/19 22:30
2008/10/1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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